| 명 칭 | 광나루터 |
|---|---|
| 한 자 | 廣津址 |
| 영 문 | Site of Gwangnaru Ferry |
| 설 명 | 서울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 원래 너븐나루 |
| 위 치 | 아차산로78길 110(광장동 128) |
| 설 치 | 1988 |
광진(廣津)은 경기도 양주의 남쪽 한강 부근에 있었던 나루로 광진도(廣津渡) 또는 양진(楊津)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광진은 능행로(陵幸路)의 길목이었다.
幸行津路: 宣陵ㆍ靖陵ㆍ章陵ㆍ健陵ㆍ顯隆園, 並由露梁, 獻陵ㆍ英陵ㆍ寧陵ㆍ仁陵ㆍ並由廣津。
행행진로(幸行津路):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ㆍ건릉(健陵)ㆍ현륭원(顯隆園)은 모두 노량진을 경유하며,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ㆍ인릉(仁陵)은 모두 광진(廣津 광나루)을 경유한다.
아래의 사료를 통해 헌릉(獻陵)과 여주 영릉(英陵) 및 녕릉(寧陵) 행차 시 광진을 이용하였음이 확인된다.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 등을 인견하는 자리에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등이 입시하여 수가(隨駕)하는 군병 및 유도(留都)하는 군병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淳曰, 所經之道, 始作於松坡倉, 而更以廣津修改矣。戊辰年則恐新治道路, 雨濕馬陷, 故以廣津作路, 而今則松坡作始之路, 亦是直路矣。上曰, 渡涉乎? 淳曰, 新川則雖作橋, 可矣。在魯曰, 新川在廣津下流矣, 如當潦雨, 則通船矣。淳曰, 臣請出去看審矣。上曰, 諸臣皆已見之矣。守禦之言, 何如? 諸臣皆曰, 坦坦大路矣。顯祿曰, 臣居在廣州, 故詳知之矣。若雨多則三處渡涉, 此甚可慮, 而先朝行幸時, 亦不由於松坡, 由路廣津, 實出萬全矣。致中曰, 戊辰初以松坡倉磨鍊治道, 改以廣津作路, 而政院日記, 無所載錄, 疎漏甚矣, 於此兩路, 取舍宜矣。尙絅曰, 前例無松坡作路之事, 且天時不可知, 若逢大雨, 則狼狽極矣。李顯祿所達, 甚得完備矣。上曰, 春雨雖來, 何必有橋壞之患? 而若臨時見敗則難矣。以萬全之道言之, 由路廣津, 可矣。 (…)
(…) 윤순이 아뢰기를, “지나는 길은 송파창(松坡倉)에서 시작하는데 다시 광진(廣津)으로 고쳤습니다. 무진년(1688, 숙종14)에는 새로 닦은 길이 비에 젖어 말이 빠질까 염려하였으므로 광진으로 길을 잡았는데 지금 송파에서 시작하는 길 또한 직로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물을 건너야 하는가?”하니, 윤순이 아뢰기를, “신천(新川)은 다리를 놓더라도 괜찮습니다.”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신천은 광진의 하류에 있으니 만약 장맛비를 만나면 배가 지나다닙니다.”하니, 윤순이 아뢰기를, “신이 나가서 살펴보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들이 모두 이미 보았으니, 수어사의 말이 어떠한가?”하니,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탄탄대로입니다.”하였다. 이현록이 아뢰기를, “신은 집이 광주에 있으므로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비가 많이 내리면 세 곳을 건너야 하니, 이는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선조께서 행행하실 때에도 송파를 거치지 않고 광진으로 지나갔으니 실로 만전의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무진년 초에 송파창으로 마련하여 길을 닦았다가 고쳐서 광진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없으니 몹시 소루합니다. 이 두 길 중에서 고르는 것이 마땅합니다.”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전례에 송파로 길을 잡은 일이 없습니다. 또 날씨를 알 수 없으니 만약 큰비를 만난다면 지극히 낭패스러울 것입니다. 이현록이 아뢴 말이 참으로 완벽을 기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봄비가 오더라도 어찌 꼭 다리가 무너지는 우환이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때 가서 낭패를 당한다면 난처하다. 만전의 방도로 말하자면 광진으로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
여주 영릉에 행행하다
甲子/上幸驪州 寧陵。 到廣津, 都監巡視旗竿折, 只拿其哨官, 下敎而不罪之。 見水原軍扈衛者, 軍容疲弊, 歎曰: "先朝嘗以水原軍, 與訓局無異, 今反如此, 何也? 水原若此, 他邑可知。 前後府使, 推考。
임금이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렀을 적에 도감(都監)이 순찰하다가 깃대가 부러진 것을 발견하고는 단지 초관(哨官)만 잡아오니, 하교(下敎)하여 죄주지 말게 하였다. 호위(護衛)하는 수원(水原) 군사들의 군용(軍容)이 피폐한 것을 보고는 한탄하기를, "선조(先朝)에는 일찍이 수원 군사를 훈련원(訓鍊院) 군사와 다름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까닭인가? 수원이 이러하니 여타의 고을도 알만하다. 전후의 부사(府使)들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수행하여 헌릉에 나가 제사를 지내다
己酉/上詣獻陵, 王世孫隨駕。 先詣昌德宮行禮眞殿, 御龍舟渡廣津 (…)
임금이 헌릉(獻陵)에 나아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예를 거행하고 나서 용주(龍舟)를 타고 광진(廣津)을 건넜다. (…)
한강을 건너기에 편한 배다리에 관한 어제 《주교지남(舟橋指南)》의 내용
舟橋節目曰: "舟橋安排, 津路爲先, 露梁津渡, 兩岸相對而高, 中流平穩而深, 且其長廣, 比纛島、西冰庫, 三分減一。 地勢之方便, 工役之省約, 甲於五江津路, 則以露梁永定溫幸時及宣陵、靖陵、章陵幸行時, 幷用此路, 獻陵、英陵 寧陵幸行, 移設於廣津。"
주교 절목(舟橋節目)에 ‘배다리를 설치할 때는 나룻길을 먼저 보아야 하는데, 노량진 건널목은 양쪽의 언덕이 마주 대하여 높고 강복판의 흐름은 평온하면서도 깊다. 그리고 그 길이와 넓이도 뚝섬[纛島]이나 서빙고(西氷庫)에 비하여 3분의 1은 적어 지형의 편리함과 공역의 절감이 오강(五江)의 나룻길 중에 가장 으뜸이다. 이에 온천에 행차할 때와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에 행차할 때 모두 이 길을 이용할 것을 영구히 결정하고,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에 행차할 때에는 광진(廣津)으로 옮겨 설치한다.’ 하였다.
또한, 광진은 도성과 경기도 광주 및 강원도 일대를 연결해 주는 나루였다.
廣津: 在州西十八里, 禿浦下流。又見楊州。
광진(廣津):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楊津: 在州南六十七里。一名廣津渡, 迷津下流。江原道春川府昭陽江, 忠淸道忠州金灘合爲此津。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渡迷津 (…) 又其西有廣津渡。 【有渡丞譏察出入, 以左道水站轉運判官兼之, 專掌漕運。】 四境, 東距楊根、龍津三十里, 西過果川、水原界至聲串八十五里, 南距利川、陽知四十五里, 北距楊州十一里, 東西一百十五里, 南北五十六里。
도미진(渡迷津) (…)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가 있다. 【도승(渡丞)이 있어서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조사하는데,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여 조운(漕運)을 관장한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근(楊根) 용진(龍津)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과천(果川)을 지나서 수원(水原) 경계의 성곶이[聲串]에 이르기 85리, 남쪽으로 이천(利川)의 양지(陽知)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11리요, 동서(東西)가 1백 15리, 남북(南北)이 56리이다.
광진간로(廣津間路)는 광나루를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었고 광주로(廣州路)는 삼전도를 지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1936년 경강의 두 번째 다리이자,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광진교가 설치되면서 광진은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會衆萬餘盛況極한 廣津橋의 初渡式 제일 먼저 이 다리를 건너는 이는 纛島尹氏一家三代
경성과 강능지방의 교통운수 문물교환상 중대 역할을 가진 광나루에 다리가 업서서 뜻잇는 인사들의 한 걱정거리로 되얏든 것을 경긔도가 주체가 되어 국고 보조와 반독지가의 지원으로 소화 9년 8월 14일부터 총공비 八十四萬三千원으로 가교에 착수하야 만잇해의 세월과 연인원 十八萬五千인의 힘을 드리는 동안에 부상당한 사람이 七명이엿섯는데 그 가운데서 三명의 사망자가 까지 내인난 공사의 광진교가 금년 九월 三十일에 준공되야 十三일 오전 十一시 十五분부터 준공식을 거행하얏다. 당일 이력사적 크나큰 다리를 맨 처음건는 사람은 임이 보도한 바와가티 고양군 뚝도면 화야리 윤상옥씨 一가 三대부 엿섯는데 이 날은 고양군과 광주군은 물논하고 경성시내에서까지 남녀노유가 물밀려드듯이 모혀서 萬여 관중은 추석이 지낸지 몃칠이 안되는 오늘에 또다시 추석을 맛난것과 흡사하게도 모혀 동일 오후 두시부터 一반의 교통을 허락하야 콧노래 부르며 락동강 다리에 다음가는 조선 제二의 기나긴 다리를 가을 하늘 맑은 바람 쏘여가면서 즐겁게 건너 다녓다.(사진은 다리와 윤씨 一가가 처음 건느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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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광진(廣津)"은 광장리 반대편에서 광나루를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현대 지도와 비교시 그림속에 묘사된 나루의 지형이 현재 표석이 위치한 지점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나루 터의 위치는 근대지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추적이 가능하다. 1:50,000 지형도를 통해 광나루 위치가 지금의 광진교보다 상류 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0,000 지형도와 현대 지도를 비교하면 지형도에 표시된 나루 위치가 실제 표석이 세워진 지점과 거의 일치한다.
현재 표석 위치에는 문제가 없다.
현재 표석문구에 큰 문제는 없다. 다만, 고지도에 의하면 광나루는 한양과 경기도 광주·강원도를 이어주는 길목이었으므로 현재 표석 문구를 ‘서울과 경기도 광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로 수정하는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또한, ‘너븐나루’라는 명칭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찾기 어려우므로 삭제하는 것을 제안한다.
광나루 터
廣津址
서울과 경기도 광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